코다의 시각과 목소리를 담은 여섯 번째 #코다시선 은 시립서대문농아인복지관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한수혁 운영위원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없었던 아이이자 코다로서 자라왔던 공백이 지금의 그에게 어떤 기억이 되었는지 읽어보세요.
아버지 같은 아이
- 한수혁 (시립서대문농아인복지관 사회복지사, 코다코리아 운영위원)
나는 아버지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주 어릴 적을 제외하면 아버지와 물리적으로 혹은 정서적으로 무언가를 함께 해본 적이 없다. 웃으며 함께 공을 찼다거나, 어깨 위에 나를 태워주었다거나, 낚시를 함께 갔다거나 하는 식의 기억은 없다. 그 자리는 공백이었다. 그러나 그 공백은 너무도 오래 내 옆에 있었기에, 그것이 없는 줄도 모르고 자랐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느 날, 사기로 인한 큰 사건 이후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은 ‘한 가족’이 아닌, 둘로 나뉜 조각이 되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남았고, 그때부터 어른이 되어야 했다.
나는 코다, 농인 부모 사이에서 자란 청인 자녀다. 아버지가 떠난 그 자리를 대신해, 나는 일찍 ‘아버지 같은’ 아이가 되었다. 병원 예약을 하고, 집으로 온 우편물을 해석하고, 전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목소리를 대신 말했다. “우리 엄마는 듣지 못하세요.” “이건 무슨 서류인가요?”
그 시절의 나는 아주 작고 조용했다. 말보다는 손을 썼고, 설명하기보다는 파악하는 데 익숙했다. 이 때문일까. 사춘기라는 단어는 내 삶에 없었다. 감정보다 역할이 먼저였고, 질문보다 대처가 먼저였다. 나는 아버지 없이 자랐고, 그래서 가정에서의 남성의 역할 같은 건 배운 적이 없다. 화를 낼 때 어떻게 내는 건지, 책임감은 어떻게 지는 건지, 한 가정을 지킨다는 것이 어떤 건지, 나는 배운 적이 없다. 나는 그저, 지켜보았다. 가끔은 텅 빈 공간을.
복지관에서 일하면서, 나는 아이들을 자주 본다. 종종 아버지의 손을 잡고 오는 아이도 있다. 강당에서 함께 공을 차고, 프로그램이 끝난 뒤 함께 간식을 먹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나는… 저런 적이 없었구나.’ ‘저런 게 가능한 장면이었구나.’
처음엔 부러웠고 나중엔 아팠다. 그리고 지금은 조용히 받아들인다. 나는 아버지가 없었다. 그건 지워지지 않는 사실이다. 내가 받은 사랑이 적었기에, 나는 사랑을 더 오래 생각하게 되었다. 아버지라는 한 사람이 비운 그 자리를 나는 어떻게든 다른 것들로 메우며 살아왔다. 이제는 그 빈자리를 품은 채로 누군가의 곁에 조용히 있어줄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나는 항상 옆에 있을게”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에게 아버지란 단지 가족 구성원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안정감을 주는 이다. 말하지 않아도, 묵묵히 곁에 있는 것으로 충분한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을 가지지 못했기에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의 삶에 조용히, 깊이, 오래 남는 사람.
아버지 없이 자란 나는 부재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무게는 지금 내 마음의 모양을 만들었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것은 목소리도, 추억도 아니었다. 비어 있는 자리와 말하지 못한 말들. 나는 그 빈자리를 오래 바라보며 자랐고, 그 자리가 결국 나라는 사람의 일부가 되었음을 이제는 받아들인다. 덕분에 나는 말 없는 슬픔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 손 내밀지 않아도, 먼저 옆에 앉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사랑이란 말로만 전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때로는 함께 있어주는 조용한 시간이 가장 깊은 위로가 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누군가의 곁에 머문다, 나처럼 말없이 자라난 누군가의 곁에. 그 아이가 자랄 때, ‘공백’이 아닌 ‘기억’을 품을 수 있도록. 아버지가 없었던 나는, 이제 누군가에게 늘 곁에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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