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코다시선은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2026 코다국제컨퍼런스에 다녀온 진보겸 심리상담사의 이야기입니다.
농인 및 농인 가족을 위한 심리상담을 어떻게 하면 제공할 수 있을지, 농인을 위한 정신건강 지원체계란 무엇인지, 이 일을 함께 하기 위한 네트워크 형성은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자신만의 속도로 고민하는 당사자가 컨퍼런스에서 만난 여러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코다의 문화 자본(Coda Cultural Wealth)’ 이야기입니다. 코다의 저항 자본을 사례로 들고 있는데요. 함께 읽어볼까요?
함께여서 보이는 길 —코다 심리상담사의 2026 코다국제컨퍼런스 참관기
- 진보겸 (한국농인가족심리상담센터 대표, 코다코리아 운영위원)
스물네 시간의 긴 비행 끝에 시카고에 도착했다. 미국 일리노이주 링컨셔에서 2026년 6월 25일부터 28일까지 열린 제38회 코다인터내셔널 컨퍼런스 CODAshire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코다(CODA)로 태어났지만 쉰 살이 넘어서야 부모의 언어인 수어를 배우기 시작한 나에게 코다국제컨퍼런스는 어떤 의미일까. 불과 3년 전, 이 세상에 코다라는 단어가 존재하고 그들의 모임인 코다코리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해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 코다국제컨퍼런스에 참석하면서 특별한 경험을 했다. 코다들은 처음 만나도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거였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형제자매처럼 느껴졌다. 살아온 환경과 경험은 달랐지만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이해받을 수 있었다.
나는 여든을 바라보는 농인 엄마와 엄마가 20년 넘게 돌봐온 장애가 있는 조카, 그리고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인 둘째 아이를 돌보며 살아간다. 말하자면 세 집 살림을 하는 셈이다. 여기에 농인 가족을 위한 심리 상담이라는 나의 일이 더해지면 주말에도 쉴 틈이 없다. 사실상 주 7일 근무다.
그런 나에게 휴식이 필요했다. 가족을 돌보는 일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갖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명목이 필요했다. 국제컨퍼런스 참석은 충분히 그럴듯한 이유였고, 짧지 않은 시간과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가족과 돌봄의 의무로부터 잠시 떠났다. 나 자신에게 휴식을 선물하고 싶었고, 지금도 그 선택은 현명했다고 믿는다.
막상 컨퍼런스에 도착하니 어쩌면 휴식이라는 이유는 명목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코다들을 만나자마자 농인 가족 상담과 농인의 정신건강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로 분주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와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 수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수어통역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나의 직업이기도 한 심리 상담을 농인과 그 가족에게 제공하고 싶고, 더 나아가 농인을 위한 정신건강 지원체계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 그 일을 함께할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도 싶다.
이전에 영국의 농인 정신건강 지원체계를 접한 적이 있었는데 미국의 상황도 궁금했다. 농인을 위한 정신건강 서비스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듣고 싶었다. 인터넷 검색이나 AI가 제공하는 정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고, 코다 심리상담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료에서는 얻을 수 없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올해 나는 농인을 대상으로 마음 건강에 관한 특강을 했고 농인 내담자를 위한 심리 상담도 시작했다. 아직 고정적인 상담센터 공간은 마련하지 않았다. 당분간은 고정비용이 들지 않는 공간을 이용하고, 운영비를 감당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면 그때 공간을 마련할 것이다. 지금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농인 당사자를 만나고, 농사회 안에서 신뢰를 쌓는 일이다. 그러나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농사회로 들어가는 출발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심리 상담이라는 전문적인 관계로 나아가기 전에 놓아야 할 징검다리는 무엇일까? 내가 이 일을 통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컨퍼런스의 일정은 빼곡했다. 스트레칭과 요가로 하루를 시작했고, 낮에는 경계, 상실, 성(性), 다문화 정체성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워크숍이 진행됐다. 부모를 잃은 코다, 농인 배우자와 살아가는 코다, 부모가 된 코다, 다문화 배경의 코다, 학대 생존자, 군인 코다 등 삶의 구체적인 경험을 나누는 소그룹 모임도 있었다. 저마다의 삶에서 겪어온 일을 안전하게 이야기하고 공감받을 수 있는 자리들이었다.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책 『우리는 코다입니다』(2019)의 공동저자이기도 한 수경 이삭슨(Su Kyong Isakson)의 ‘코다 문화 자본(Coda Cultural Wealth)’ 워크숍이었다. 수경은 농인의 자녀인 코다는 여러 문화적 자본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고, 그중 내게 가장 와닿은 것은 저항 자본(Resistance Capital)이었다. 차별과 부당한 대우에 침묵하지 않고 맞설 수 있는 힘이다.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는 농인을 대상으로 한 편견과 차별이 존재한다. 코다는 어릴 때부터 부모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모습을 목격하고 때로는 부모를 대신해 세상과 맞선다. 이와 같은 경험은 어떤 코다에게는 상처로 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의에 맞서는 감각과 힘을 기르는 계기가 된다. 물론 모든 코다가 같은 경험을 하거나 같은 힘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개념은 내가 살아온 시간을 새롭게 바라보게 했다. 그동안 개인적인 성격이나 삶의 태도라고 여겼던 것 가운데 일부는 내가 코다이기 때문이라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마지막 날에는 상담사이자 작가로 활동하는 실라 제이콥스(Sheila Jacobs)의 소개로 미국의 코다 상담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 연락을 주고받자고 결의하고 단체 채팅방을 만들었다.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농인의 정신 건강을 위해 무엇을 함께할 수 있을지 이제부터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려 한다.
이번 컨퍼런스에서도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쉼을 찾으러 갔지만 일을 생각했고, 코다를 만나러 갔지만 농인의 정신건강을 고민했으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었지만 그 관계를 어디로 이끌어야 할지는 아직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수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3년째에 접어든다. 나는 여전히 가야 할 길을 찾고 있다. 그건 아무도 대신하여 찾아줄 수 없고, 결국 내가 찾아야 한다. 그러나 늘 그랬듯 혼자 가는 길보다 함께 가는 길이 훨씬 풍성할 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