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열 번째가 되었군요! 스무 번째의 코다레터와 열 번째의 코다시선이라니! (축하축하🎆)
코다의 시각과 목소리를 담은 열 번째 #코다시선은 OHCODA이자 에이유디사회적협동조합 부장으로 일하는 전상은 회원의 이야기입니다.
OHCODA는 Only Hearing Children of Deaf Adults의 줄임말로 농인 부모와 농인 형제자매로 이루어진 가족 구성원 중 유일하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코다를 일컫는 용어인데요. 가족 내에서 OHCODA로서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부채감'을 가지며 살아왔던 이야기를 솔직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코다시선에서 OHCODA의 경험을 다루는 건 처음이어서 이를 통해 OHCODA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무척이나 기뻤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모든 코다가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코다여도 우리는 이렇게 또 다르고 다채로와요. 그럼 함께 읽어보아요!
안 좋은 건 내가 다 가져갔으니까
- 전상은 (에이유디사회적협동조합 부장, 코다코리아 회원)
다르다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언제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스스로를 다르다기보다는 특별하다고 생각하며 자랐던 것 같다. 부모님은 농인이었고, 나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음성언어 대신 수어를 사용했다. 우리 가족은 우리만의 언어와 문화를 만들어가며 살아왔고, 그 안에서 나는 유일하게 수어와 음성언어를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아이였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나를 조금 더 다양한 세상 속에서 살게 했다. 그 부분이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주었다. 동생도 그랬다. 나의 여동생은 가족과 친척 누구도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는데 자신만 보청기를 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스스로를 굉장히 특별하고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동시에 나는 아주 보편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다녔던 농인 교회에는 나와 같은 코다(CODA) 아이들이 정말 많았다. 또래 아이들은 예배보다는 함께 몰려다니며 교회와 주변을 뛰어다니는 데 열심이었다. 말 그대로 정말 쏘다녔다. 서대문 일대를 악동들처럼 우르르 몰려다녔다. 우리는 한국어와 수어를 사용했다. 부모님과 이야기할 때는 수어를 썼고, 우리끼리는 음성언어를 더 많이 사용했다. 우리는 같은 언어를 사용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다. 같은 속성의 무언가를 함께 겪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그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나는 내가 보편적이라는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주는 안정감과 동시에 강한 소속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나는 조금 달랐다. 나는 유일한 OHCODA(Only Hearing Children of Deaf Adults의 줄임말로 농인 부모와 농인 형제자매로 이루어진 가족 구성원 중 유일하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코다를 일컫는 말)였다. 다른 코다 형제자매가 음성언어로 소통할 때 나와 동생은 수어로 소통했다. 나는 들을 수 있었기에 음성언어를 주로 사용했고, 동생은 농인이었기에 수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건 그렇게까지 신경쓰일만한 일도,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우리는 그저 평범한 자매였다. 매일 하나뿐인 컴퓨터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뚫어져라 노려보았고, 맛있는 음식을 뺏기고 싶지 않아 누구보다 빨리 먹어치웠다. 종종 소리를 지르며 싸우기도 했다. “컴퓨터 몇 시간째 하는 거야?” “내가 왜 네 숙제를 도와줘야 해?” “내 친구 버디버디 아이디 외우지 마!” 같은 말들이 매일 오갔다. 그렇게 으르렁거리다가도 누군가 내 동생을 괴롭힌다고 하면 피가 거꾸로 솟았다. 내 동생은 나만 괴롭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내가 다니는 학교에는 한 번도 온 적이 없다는 사실도, 동생의 유치원에는 늘 함께 갔다는 사실도, 동생의 학부모 모임에는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는 사실도 이상할 만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어릴 적 몸이 좋지 않아 대학병원에 한 달 정도 입원한 적이 있다. 어른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그 시절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 중 하나로 기억한다. 만화를 하루종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도 나는 부모님의 병간호를 받아본 적이 없다. 엄마는 동생을 학교에 보내야 했고, 다시 데리고 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일을 서운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어쩌면 아주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갖게 된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부채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는지 귀가 먹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귀 안을 무엇인가가 막고 있는 듯했고, 고막 위에 얇은 막이 덮인 것 같은 기분이 계속됐다. 별일 아니겠거니 넘기기에는 이상하게 불안했다. 평소에는 병원에 잘 가지 않지만 조심스럽게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동생에게 말로만 들었던 청력검사라는 걸 받기 위해 부스 안에 들어갔다. 외부의 소리가 차단되자 설명하기 어려운 공포가 밀려왔다. 검사를 위해 착용한 헤드셋에서 들리는 소리보다 내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띠-, 띠-, 띠-’ 소리가 들릴 때마다 버튼을 눌렀지만, 내가 정말 그 소리를 들은 건지, 듣고 있다고 착각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소리에 대한 불확실성을 느껴본 것이 처음이었기에 혼란스러웠다. 나의 모든 신경세포의 움직임이 들리는 것만 같았고, 그 모든 것이 거슬렸다. 식은땀이 나면서 온몸이 끈적끈적해졌고 그 공간 안의 나 자신을 견디는 것조차 버거웠다.
검사 결과는 ‘돌발성 난청’이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가 앞으로 지금처럼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면, 내가 해오던 역할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라는 것이었다. 일상생활 속에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나를 의지하고 있는 가족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세상이 흔들리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귀만 먹먹해진 것이 아니라 머리와 마음마저 함께 먹먹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후 한동안 스테로이드를 복용하며 여러 병원을 돌아다녔다. 이상 소견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귀 상태를 확인했고, 이어폰을 끼며 소리가 제대로 들리는지 반복해서 점검했다. 하지만 그로 인한 불안은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스테로이드가 만들어내는 예민함과 불안은 혼자 삼키기 어려울 만큼 커졌다. 고민 끝에 동생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코다로서의 고민과 두려움이 농인인 동생에게는 사치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생은 불안하다는 나의 말에 함께 흔들려 주고 걱정해 주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언니, 안 좋은 것은 내가 다 가져갔으니까 괜찮을 거야.”
아찔했다. 지금 내 동생에게 무슨 말을 한 거지? 세상이 뒤틀렸다. 웃으면서 대답하는 아이에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몸이 고장이 난 것만 같았다. 아니, 나는 그때 정말로 고장이 났다. “네가 뭘 안 좋은 것을 가져갔다는 거야”라고 소리 지르면서 울었다. 음성언어 중심 사회에서 농인인 동생이 청인인 나와 함께 살아오면서 느꼈을 복잡한 감정이 물밀 듯이 밀려 들어왔다. 차라리 우리가 반대였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OHCODA라는 정체성을 다시 바라보았다. 우리는 같은 부모에게서 자랐지만 서로 다른 언어와 다른 감각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며 다른 차별의 경험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OHCODA이기에 접하는 특별한 순간도 있다. 어느 날 저녁, 모든 채널이 긴급 뉴스로 가득했던 때다.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수어통역 영상은 없었고, 방송은 빨간 헤드라인만 반복해서 내보내고 있었다. 엄마는 수어통역이 없는 화면 앞에서 불안해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까. 실시간 자막은 송출되고 있었다. 자막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동생은 자막을 통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나는 귀로 들은 정보를 엄마에게 전달했다. 사실 그 순간에도 농난청인의 정보접근성이 이렇게 쉽게 배제된다는 사실에 분노했지만,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읽어내며 엄마의 접근성을 보완하던 그 장면이 이상하게도 멋지게 느껴졌다.
OHCODA는 형제자매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그 정체성을 한 번 더 인지하게 된다. 다른 감각을 타고났기에 사용하는 언어가 다름으로 인해 발생하는 일들로 인해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상황들을 마주하게 된다. 종종 그것이 버겁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멋지거나 아름답기도 하다. 그러니 나와 같은 OHCODA가 있다면 각자의 방식대로 살고 있는 이들을 응원해 주자고 말하고 싶다.
CODA는 다름으로서 특별한 존재다. 책임감이 늘 따라붙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함을 퇴색시키지는 못한다. 그러니 다름으로서 얻게 되는 그 특별함을 잊지 않고 소중하게 여겨주자. 다름 속에서 자라난 우리가 다른 세계를 오가며 서로를 이해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특별하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