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다의 시각과 목소리를 담은 여덟 번째 #코다시선 은 도쿄국제농예술제에서 코다로서 자신의 이야기와 목소리를 담은 영화 〈소리의 소리〉를 상영한 영화감독 한소리의 이야기입니다.
한소리 회원은 수어를 사용하지 않는 코다입니다. 구화를 사용하는 어머니와 음성언어를 통해 소통해왔고 그와 어떻게 소통해왔는지, 그와 소통하는 코다로서의 나의 모습은 어떤지 카메라를 경유하여 바라봅니다. 이를 통해 코다 안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요. 왜 영화를 만들게 되었는지, 이번 도쿄국제농예술제에서의 상영 및 관객과의 대화는 어땠는지 궁금하여 기고를 요청했습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결국 나를 위해 카메라를 든다
- 한소리 (영화감독, 코다코리아 회원)
아마 그녀가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던 날이었을 거다. 나는 지하상가에 있는 서점에 가서 수어를 알려주는 책을 샀다. 노란 표지의 책을 들고 집에 와 첫 장을 넘기자, 숫자를 알려주는 손가락 사진들이 나왔다. 사진을 보며 손가락을 천천히 꼼지락거렸다. 잠시 외출했던 그녀가 집에 왔고, 내가 사 온 수어책을 보며 그녀가 말했다.
“나는 수어 몰라.”
처음 알았다. 수어를 할 줄 모르는 청각장애인도 있구나. 청각장애인이라면 수어를 다 할 줄 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낯선 언어인 수어를 안 배워도 된다니. 방학 숙제가 하나 줄어든 기분이었다. 그때의 내 나이가 8살, 나는 그녀의 딸 한소리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그녀는 바로 우리 엄마 장길혜다.
청각장애가 있는 길혜에게 이 세상은 속삭임으로 가득 차 있다. 조용한 세상에서 사람들의 말은 ‘입 모양 읽기’가 된다. 길혜는 그렇게 소리를 느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줄곧 온갖 상점이나 은행, 동사무소, 공항 같은 곳에 엄마와 갈 때면 나는 항상 그녀를 대신해서 말했다. 그것이 더 편하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것이 20년 이상 지속되었다. 엄마가 직접 세상과 소통하는 대신 내가 나서는 게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코다로서 길혜 대신 듣고 말하는 게 길혜를 위한 일이자 길혜를 사랑하는 법이라 믿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그 믿음이 산산이 부서진 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부터였다.
어느 날 아침, 외할아버지가 쓰러지셨고, 그와 함께 응급실에 들어갈 보호자 한 명이 필요했다. 길혜도, 나도,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보호자는 딸 길혜가 아닌 손녀인 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응급실 안에서 이루어질 소통을 생각했을 때 내가 들어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길혜는 그대로 병원 로비에 남고, 나는 외할아버지와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 응급실에 있는 동안 할아버지는 한 번씩 길혜를 찾았다. 나는 ‘병원에서 보호자는 1명밖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한다’며 계속해서 길혜의 자리를 대신했다.
그렇게 외할아버지가 의식이 있던 상태에서, 그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사람은 내가 됐다. 내가 외할아버지 곁에 있는 동안, 길혜가 혼자 병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 시간 동안 길혜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 없다. 장례식 직후, 나는 길혜에게 슬퍼한다고 할아버지가 돌아오는 것은 아니니 그만 슬퍼하고 씩씩하게 웃고 다니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가 슬퍼할 시간을 묵묵히 기다려주지도 못하고, 함께 슬퍼할 줄도 몰랐다. 길혜 대신 내가 보호자로서 할아버지와 마지막 순간을 보낸 것에 대한 사과도 할 줄 몰랐다.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리’라는 내 이름은 나를 짓누른다. 들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길혜와 내가 수십 년간 잘 지켜온 규칙이 한두 개가 아니다. 그것은 엄마와 나의 차이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소리 안에 엄마를 가두고 그녀의 고유함을 뭉개버렸다. 나는 우리에게 벌어질 충돌을 두려워했다. 나의 소리는 길혜의 자리를 고려하지 않았고, 나의 소리가 길혜를 돕는다고 생각했던 오랜 시간은 허상에 불과했다.
그 마음과 기억으로 만든 영상이 〈소리의 소리〉였다. 누가 누구를 대신하거나 도우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28분짜리 영상 안에서만큼은 각자의 세계로 서 있고 싶었다. 나는 내가 만든 영상을 두고 ‘브이로그 같으면서 브이로그 아닌 이상한 거’라고 부르곤 했다. 그런데 그것이 영화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상영이라는 걸 하게 되면서 길혜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닌 또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도록 이끌어주고 있다. 그 연대 속에서 나는, 길혜와 내가 영화 바깥에서도 각자의 세계로 설 수 있겠다는 희망을 엿보게 되었다.
이번 도쿄국제농예술제에서 〈소리의 소리〉를 상영을 마치고 이런 소감을 들었다. 길혜와 소리가 서로를 찍어 주려는 모습에서 농인과 코다, 부모와 자녀 관계를 떠나서 한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도 감상할 수 있었다, 코다가 농인 부모와 소통하려 애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민했을 때 그중 하나는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노력이 아닐까 싶다는 이야기였다. 숨기고 있던 마음을 들킨 느낌이었다. 맞다. 그 말대로 코다로서 내가 엄마의 일상을 기록하는 걸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내 자신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일본에서의 상영 이후에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 행사에서 일본수어-일본음성언어-한국음성언어로 여러 차례의 통역을 거쳐야 했지만,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정확하게 관통할 수 있었던 걸까. 나는 내 마음을 들키고 말았다. 영화를 찍으면서 처음 알게 된 건, 길혜와 대화할 때만 나오는 나의 독특한 습관이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를 본 지인들도 이를 신기해하고 궁금해했다. 그들이 말해주기 전까지는 나도 몰랐던 사실이다. 길혜와 있을 때만 나오는 말투와 리듬이 있다니. 그러면 언젠가, 길혜와 함께 할 수 없다면, 그 말투와 리듬도, 그 속에 존재하던 나의 모습도 서서히 사라지는 것일까. 그 생각에 또 다시 카메라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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